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귄터 폰 클루게 (문단 편집) ==== [[쿠르스크 전투|쿠르스크]]-오렐 전투,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 ==== 7월 5일부터 12일까지의 쿠르스크 작전 북방 전투는 "신형 전차가 차이츨러 [[육군참모총장]]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라던 구데리안의 예측이 무섭도록 들어맞았는데 신형 전차 중 판터는 전부 남부집단군으로 보급되었고, 중부집단군에는 [[페르디난트 구축전차|포르셰 티거]][* 현대에는 페르디난트로 통칭되나, 1950~60년대의 독일어 서적에서는 포르셰 티거로 단독 표기하거나 포르셰 티거(페르디난트)로 병기되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 원문에 저자가 구데리안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포르셰 티거로 표기한 만큼 이를 존중하기로 한다]가 배치되었다. 하지만 전방 [[기관총]]조차도 장착되지 않았던 탓에 이런 중[[구축전차]]는 소련군의 육탄 공세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구데리안이 남부집단군 장교들에게 전해 준 내용을 인용하면 "소련군 보병 진지를 공격하는데 대포로 메추리를 잡는 격이 되어 [[https://en.wikipedia.org/wiki/Helmuth_Weidling|헬무트 바이틀링]][* [[베를린 전투]] 당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장성이다.] 장군의 용맹스러운 기갑 돌파가 후속 성공을 가져오지 못하며 돈좌되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발발 1주일 만에 쿠투조프 작전으로 오렐을 공격하면서 9군의 공세는 포니리에서 진격을 멈추었는데, 이때 클루게는 가히 번개 같은 속도로 휘하의 페르디난트 부대를 비롯한 예비대를 전부 오렐에 투입, 9군이 오렐로 회군할 때까지의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나아가 9군 사령관 모델에게 2기갑군의 지휘권을 겸임시켰는데 이는 오렐 돌출부의 통합된 지휘를 가능케 했다. 폰 그뢰벤 장군은 이러한 클루게의 결단을 '''[[신의 한수]]'''로 높이 평가하였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 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 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만 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만 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특히 소련군 포로 1만 1,732명까지 데리고 하겐 라인으로 무사히 퇴각한다.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은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을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렇듯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과감함을 겸비한 결단을 내렸던 클루게는 10월 28일, 민스크-[[스몰렌스크]] 방면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중상을 입고 오랜 시간 요양하게 된다. 중부집단군 사령관은 [[에른스트 부슈]] 원수가 임명되는데 당시의 부슈 원수는 적극성을 완전히 상실한 모습으로 일관하였기에 이러한 인사 조치는 중부집단군 최대의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특히 이듬해인 1944년 6월, 중부집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바그라티온 공세]]의 직격타를 얻어맞는 전례없는 위기 상황에서 부슈 원수는 히틀러의 후퇴 불가 명령만 되풀이했다. 히틀러의 간섭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후퇴허가가 너무 늦게 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는 포위망으로 되돌아가라거나 일부 부대는 포위망에 무조건 남아야 한다는 정신나간 명령도 내려졌다. 부슈 원수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스스로 바로잡으려기 보다는 히틀러의 눈치만 보며 매달렸다. 결국 공세 시작 6일만인 6월 28일, 중부집단군 전체가 포위 섬멸당할 ~~터무니 없는~~위기에 처해졌고, 사령관은 발터 모델 원수로 교체된다. 부슈는 동부 전선에 참전한 독일군 원수 중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는 불명예를 뒤집어 썼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